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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역사

골프의 역사 - 1

by ljka_dljit 2022. 3. 3.

1. 골프의 기원

 

골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의문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동안 그 시간을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 이 게임을 발명했다고 한다.

가령, 한 젊은 어부가 둔덕이 지고 잔디가 자라난 모래언덕의 샛길을 걸어가면서 바다에서 떠내려온 나무막대를 집어 들어 조약돌을 치는 장면보다 더 자연스러운 장면이 또 있을까? 그리고 한번 조약돌을 쳐본 뒤에는 더 멀리 쳐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 다시 한번 돌을 쳐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쳐낸 조약돌이 양 떼들이 밟고 지나간 모래로 가득 탄 후미진 곳으로 어쩌다가 굴러 들어가게 되면 이곳이 바로 조약돌의 전진을 가로막는 첫 번째 장애물이 된다. 이 지점에서 경기자는 한차례의 좌절을 맛보면서 더 큰 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잠차 발전되어 마침내는 배에서 시작하여 링크스(모래펄)를 가로질러 나가 마을 어귀의 여관 근처로 추측되는 지점에서 끝나는 어부들 간의 경쟁적인 게임이 되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다가. 조약 돌이 토끼 구멍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발생함으로써 골프라는 게임을 발명하는 작업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다.

세인트 앤드루스에는 수많은 링크스가 있으며 또 올드 코스에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골프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육로가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고전적인 링크스이다.

최초의 게임이 스코틀랜드의 어느 지방에서 치러졌는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457년 당시 내지는 훨씬 그 이전부터 레이드 지방에 골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거도 있다.

세인트 앤드루스에 앞서 레이드 지방에 이미 골프 링크스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독일 해( German Ocean)로 불리던 바다를 거론하고 있다. 즉 당시 세인트 앤드루스는 밀물이 들어올 때면 링크스가 물에 잠겨 사용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세인트 앤드루스의 링크스는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금도 다 훨씬 더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16세기 초에 세인트 앤드루스에 이미 골프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552 1 15일 제정된 헌장에 따라 당시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골프, 풋, 볼, 사격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오락을 하는데에 이 링크스들을 언제든 사 용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 1세기 전부터 골프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거의 틀림없다. 16-17세기 당시의 교구 기록을 보면 초창기 골프에 관한 또 다른 많은 증거들이 등장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동해안 지방에서는 교구민들이 설교를 들어야 할 시간에 골프를 쳤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고 있다.

1599년 당시 세인트 앤드루스에서는 이처럼 신앙이 부족한 교도들에게 처음 두 번에 한해서 소액의 벌금을 부과하는데 그래도 계속 이를 어기면 끔찍한 참회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렇게 되면 그 죄인들은 그 후 직책이 박탈되고 파문을 당하는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영국이 로 컨트리(베네룩스 3)처럼 섬세한 예술 감각을 가 지고 있었다면 초창기의 코스들을 증명할 만한 많은 그림들을 남겼을 것이다. 골프 사학자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콜을 주제로 한 플랑드르의 그림들과 콜벤을 주제로 한 네덜란드의 그림 들은 골프를 묘사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그림들보다 훨씬 더 이전의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대륙의 예술 감각이 더 뛰어났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회화라는 예술이 영국인의 취향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2. 골프의 금지

 

훈련은 뒷전이고 골프에 열중인 병사들

 

골프가 전쟁에서 비참한 패배를 초래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가설을 만들어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코틀랜드는 첫 기습을 당했을 때부터 잉글랜드에 참패를 한다. 그런데 이로부터 50년 전인 145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2세는 골프 가 궁중 훈련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고 판단하여 스코틀랜드 의회 법령을 통해 골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인들은 이 법을 별로 지키지 않았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그 후에도 계속 금지령이 내려지지만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더 늘어갈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클럽으로 볼을 치는 국민 전체의 실력은 늘어가는 데에 반해 활 솜씨는 나날이 저하되고 있었다. 골프에 대한 스코틀랜드 인들의 애착이 워낙 대단했던 탓에 그로부터 40년 후에는 결국 금지법이 폐지되고 만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골프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제임스 2세가 골프를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기 100년 전부터 골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왕실이 스코틀랜드 왕이 내세운 것과 동일한 이유, 즉, 전투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볼을 사용하는 모든 게임을 금지시켰던 1319년 당시에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미 골프가 성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 왕실의 후원

 

이 게임은 16세기에 걸쳐 스코틀랜드 동해안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으며 또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부터 골프는 비로소 최고의 신분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게 되는데 일례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6세는 이후 1603년에 잉글랜드의 왕위를 이어받아 제임스 1세가 1 될 때까지만 해도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골프 애호가 메리여왕

 

그의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역시 유명한 골프 애호가였다. 메리 여왕은 자신의 시녀인 메리 세턴과 함께 골프를 쳐서 게임에 지자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메리여왕은 1567년에는 남편인 로드 단리의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며칠되지 않아 골프를 쳤던 사건으로 인해 교회와 충돌한다. 그러나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왕족이 이 게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골프는 몬트로즈와 같은 북쪽 지방에서도 유행하고 있어 을뿐 아니라 16 세기 초에는 내륙의 퍼스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제임스 4세 시절의 일로 추측된다.

제임스 4세는 이 게임을 최초로 금지시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은 그 자신이 골프 애호가로 변신하고 말았다. 1502년에는 왕실의 회계원이 퍼스의 활 제조업자에게 클럽을 주문하면서 14실링을 지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 이후로도 왕실의 금고에서는 계속 지폐가 지출되는데 그 내역을 보면 골프공을 재작 하기 위한 지출도 있으며 심지어는 게임을 하다 진 빚을 갚기 위한 것도 있었다.

왕실 회계 담당자의 장부 중에는 보스웰 백작에게 14실링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항목이 있는데 이는 왕이 링크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내기골프를 하다가 진 빚이었던 것이다.

 

4. 골프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세계 골퍼들의 버킷리스트가 된 스코틀랜드

 

골프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확산되고 나아가 다른 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던 데에는 왕실의 적극적인 관심이 큰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초창기에 골프의 중심지로 등장했던 지역들은 하나같이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거나 아니면 세인트 앤드루스와 같이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 개의 축-교육과 교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세인트 엔드루스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가장 연륜이 깊은 교육의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강력한 힘을 가진 교회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는 왕실의 중앙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써 이 도시의 주변에서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골프가 상당히 번창했다. 던퍼믈 런과 퍼스와 같이 왕궁이 있던 다른 도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갤러웨이 주교 역시 대단한 골프 애호가였는데 이는 그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 남서부 지방은 로 골프가 확산되는데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또한 몬트로즈의 후작 역시 이에 못지않은 골프 애호가였으며 이 같은 사실은 이곳이 초창기의 골프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 경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골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그 범위는 남동 지방에 서 시작하여 머나먼 최북단에 위치한 바람 많은 오크니 아일랜드로까지 뻗어갔다. 오크니 아일랜드에 골프를 도입했던 인물은 데이비드 몬 테이드와 제임스 딕슨이라는 사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골프가 이렇게 인기를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조직화된 게임의 형태를 갖추게 되기까지는 또다시 150여 년이 흘렀다. 그렇지만 열렬한 애호가들이 골프를 즐길만한 공간은 충분했다.

최북단에 위치한 케이스네스의 동해안에는 농장물을 재배하기엔 대단히 부적당하면서도 여유 있게 골프를 즐기기에는 매우 안성맞춤인 모래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 해변의 모래땅은 수세기에 걸쳐 바다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면서 생겨난 곳으로 모래로 덮인 광활한 부지였다. 지금도 영국의 많은 코스에서는 바다조개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그곳이 한때는 바다로 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강물은 이 모래땅인 황무지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침적토를 쌓아 올렸고 또 각종 씨앗을 운반해 왔다. 바다를 향해 부는 산들바람에 모래가 날리면서 커다란 언덕들이 생겨났으며 이 언덕들은 끊임없이 이동을 거듭하다가 야생잔디가 그 속에 뿌리를 내려 그 장소에 영원히 정착을 하게 되었다..

새들이 거름을 만들어 주고 또 스코틀랜드의 기후가 물을 공급해 줌으로써 잔디는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골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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